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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국제 혼인평등 컨퍼런스 활동가 후기

지난 16일, 우리 국회에서 최초로 ‘혼인평등’, ‘동성혼 법제화’를 주제로 한 국제 컨퍼런스가 개최되었습니다. 무지개행동-모두의결혼 주최로 열린 이번 <국제 혼인평등 컨퍼런스>에는 무지개행동 소속단체인 다움 의 운영위원 기진과 기용도 참석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혼인평등 운동가들과 세계 각국에서 모신 연사들로부터 배운 소중한 경험을 활동가 후기로 전해드립니다!
다양성을 향한 지속가능한 움직임, 다움 운영위원 기진
“동성혼 법제화, 왜 지금이냐?”
제 나이 29, 사촌은 물론 직장 동료와 친구, 지인들로부터 청첩장을 받는 일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때가 되었습니다. 최근에 대학 시절 총학생회 활동을 함께한 헤테로 이성애자 형을 만나 술을 마시던 중 어쩌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형은 주변에 아무도 결혼한 사람이 없었을 때에는 결혼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가, 슬슬 나이가 “결혼 적령기” 구간에 진입하게 되면서 ‘아, 결혼에 대한 기조문을 써야겠다’고 갑자기 다짐했다고 합니다. 대화 중에 불쑥 튀어나온 “결혼 기조문”이라는 말이 위기감 같은 결혼에 대한 형의 다양한 인상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앞에서 폭소를 터뜨렸던 기억이 납니다.
제 커밍아웃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줬던 학생회 시절 동료이자 지금은 오랜 친구인 형에게 결혼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결혼이라는 말이 아직까지는 그다지 와닿지 않는 성소수자 게이인 제가 언젠가는 “결혼 기조문”을 써야 한다면 어떻게 써야 할까요? 당연하게게도 저는 저의 기조 이전에 동성혼에 대한 사회의 기조가 우선 서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는 인생의 파트너를 만나 새로이 가족을 꾸리는 것이 ‘결혼’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 듭니다. 제 주변의 결혼 소식이 더이상 어색하지 않게 된 지금까지도 그런 권리가 이성 커플에게만 주어지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불합리한 현실입니다. 때문에 우리 사회가 결혼에 대한 기조문을 새로 쓴다면, 그것은 변화한 ‘가족’의 형태와 의미에 맞춰 누구나 평등하게 결혼할 수 있음을 선언하는 일종의 권리장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번 혼인평등 컨퍼런스에서 국내와 해외 혼인평등 운동의 주역분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아직 동성혼 법제화가 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저는 저의 결혼에 대한 “기조문”을 차근차근 다듬어 보려고 합니다. 다움 활동가로서 겪은 경험을 전해드리는 이 컨퍼런스 후기가,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께도 결혼에 대한 스스로의 기조를 정리해보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족’의 형태와 의미는 시대와 함께 변화하며 다방면으로 진보해왔습니다. 오래 전 서로 다른 신분 간의 결혼을 터부시 해오던 것이 근대화에 따른 신분제 폐지와 함께 역사 한켠으로 사라졌습니다. 타인종 간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회에서 혼혈에게 가해진 편견과 혐오도 현대에 와서는 퇴출되어야 할 인종차별으로 다뤄지면서, 지구촌은 갈수록 다인종·다문화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동성 커플간의 결혼 또한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에서 성소수자는 이미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비상계엄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성숙한 시민들 모두가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을 중심으로 조직된 성소수자들이이 광장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내란을 일으킨 정권 아래에서 억압받아온 권리를 외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민주주의의 장 안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전체 가구 형태 중 20% 수준에 그쳤던 ‘1인 가구’는 2025년 현재 42%로 최다 비중을 차지하며 한국 사회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가구 형태가 되었습니다. 친구나 지인, 애인 혹은 파트너 등 비혈연관계의 사람과의 동거로 가족을 꾸리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통계만으로도 ‘가족’의 범주를 이성 간의 결혼과 혈연관계를 기준으로만 재단하며 정상성에서 벗어난 가족 형태로의 법적 보호와 권리, 혜택은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는 현행 가족법이 이미 시대의 흐름에서 한참이나 뒤쳐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 ‘동성혼’은 성소수자 운동의 최종 목적지가 아닌 변화의 분기점입니다. 어떤 시민에게는 권리를 부여하고 어떤 시민은 배제하는 방식의 관습적 차별로 지속되어 온 ‘가족’의 형태와 의미를 확장하고, “내가 원하는 가족을 구성할 자유와 권리”를 공정과 평등의 영역에서 돌아볼 수 있는 출발선입니다.
총 3개 세션으로 진행된 이번 컨퍼런스에서 국적불문의 모든 연사분들이 동일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전세계 어느 국가와 사회에서나 ‘가족’의 정의는 확장되어 왔기 때문에 결혼을 규정하고 있는 가족법, 결혼법을 혼인평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개정하거나 제도를 보완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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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열린 1부 세션은 뉴질랜드의 루이자 월 의원님의 발제로 시작되었습니다. 루이자 의원님께선 뉴질랜드 사회가 영국의 식민지배를 당한 다른 국가와 동일하게 인종이 다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시민의 권리가 법적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변화화해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포용하며 성장해온 뉴질랜드 시민사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루이자 월 의원은 지난 2012년 혼인평등을 위한 ‘결혼 수정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동일한 법안이 2013년에 가결됨에 따라, 마침내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13번째로 동성 결혼을 법제화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전통이라는 가치 안에서만 해석되어 온 결혼을 시민권의 시각에서 재정의하고, 유권자들은 물론 동료 정치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자신만의 정치적 언어를 다듬어온 루이자 의원님에게서 정치인으로서의 깊은 관록이 느껴졌습니다. 뉴질랜드로 돌아간 후에도 내년에 예정되어 있는 차기 선거에서, 그리고 앞으로도 동료 성소수자 시민의 권리 보장을 위한 정치 행보를 계속하겠다는 말씀에서 평등을 향한 그녀의 무한한 열망과 뜨거운 열정이 전해졌습니다.
이어진 순서는 21대 국회에서 혼인평등법-생활동반자법-비혼출산지원법으로 구성된 ‘가족구성권 3법’을 발의한 정의당 장혜영 의원님의 발제였습니다. 생활동반자법이 ‘순한맛 동성혼’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입법 단계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는 의원님의 후일담이 인상 깊었습니다. 끝내 이를 돌파할 정무적 판단으로 혼인평등법을 가족 3법으로 함께 묶어 정면으로 발의하는 결단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총 12명의 공동발의 의원을 모아 ‘가족구성권 3법’을 발의하는 과정에서 많은 열정을 쏟아주셨을 장혜영 의원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특히나 발제를 마치시며 남기신 “국가 기관과 정치는 법의 불명확성을 이유로 동성 커플을 관습적으로 결혼 제도에서 배제해온 차별 관행을 끊어낼 책무가 있다”라는 발언은 마치 현재 혼인평등 소송이 진행 중인 우리 헌법재판소를 향해 하신 말씀처럼 느껴져 마음이 후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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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인터미션 후에는 우리나라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혼인’을 국제인권법·비교법의 관점에서, 또 헌법 해석의 시각에서 살펴보기 위한 2부 세션이 이어졌습니다.
옆나라 일본에서 오신 카토 타케하루 변호사님은 훗카이도 고등재판소에서 혼인평등 소송 최후 진술은 물론 변론 과정에 함께하며 최종 승소 판결을 이끌어낸 분으로, 그가 함께하고 있는 ‘마리포올재팬(Marriage For All Japan)’의 혼인평등 운동이 지금 우리나라의 혼인평등 운동 전략과 닮았다고고 생각되어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2부 마지막 발제를 맡아주신 조숙현 변호사님은 우리나라 혼인평등 소송의 대리인단 단장을 맡고 계신 분입니다. 2001년 호주제 위헌·폐지 소송을 시작으로 법조 커리어를 쌓아왔다는 변호사님께서는 우리나라 가족법 역시 동성동본 금혼제와 호주제, 부성승계강제 원칙 폐지와 같은 차별적인 법 규정을 여러 사법절차로 해소하며 개선되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막상 호주제가 폐지된 후에 겨우 20여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비상식적인 법이 있었던가 기억도 하지 못한다며, 제도가 우선 마련되면 사람들의 인식과 상식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변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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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3부 세션에서는 대만과 아일랜드의 동성혼 법제화 과정을 먼저 듣고 난 후, 우리나라 혼인평등 운동과 비교해볼 수 있었습니다. 각각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배와 영연방으로부터의 독립 경험이 있는 두 나라는 섬나라라는 점에서도 우리나라와 지정학적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대만과 아일랜드의 혼인평등 모두 성소수자 운동의 한 갈래로 차근차근 진행되었고, 입법과 국민투표라는 정치 시스템 안에서의 로비 활동과 잇따른 법안발의가 이를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서로 닮은 구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례를 세세하게 바라봤을 때는, 성소수자 운동 단체와 커뮤니티, 정치인, 그리고 활동가를 중심으로 각 나라마다 혼인평등 운동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그러한 끊임없는 노력이 혼인평등이라는 변화로 이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만의 동성결혼법 제정 과정을 담은 유메이뉘 의원의 책이 곧 한국에서도 출간된다고 합니다. 정식 출간 소식이 들려오면 다다닫을 통해 구독자 분들께도 반갑게 알려드리겠습니다.)
3부 세션에서 그 동안 잘 모르고 있었던 아일랜드의 동성혼 법제화 과정에 대해서 알게 된 후기를 좀 더 풀어보겠습니다. 보수 카톨릭이 바탕이 되는 아일랜드 사회에서 ‘동성혼 법제화’는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성장하며 대중의 성소수자-혼인평등 지지를 전략적으로 조직하고 이끌어내온, 성소수자 운동의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아일랜드 혼인평등 운동을 대표하여 발제를 맡아주신 모니냐 그리피스(Moninne Griffith) 활동가님께서는 여러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대중을 목표로 한 투표 캠페인을 통해 국민투표 유권자의 찬성 투표(찬성률 60%)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며, 국민투표로 동성결혼을 법제화한 최초의 국가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자긍심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상황으로 돌아와, 모두의결혼(혼인평등연대)의 이호림 대표님의 발제가 이어졌습니다. 모두의결혼은 2028년 혼인평등 헌법소원소송의 승소를 목표로 소송 참여 원고들의 삶과 이야기를 가시화하고 결혼과 가족구성권을 향한 성소수자의 욕구를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번 소송에서 원고로 나선 13쌍의 동성 부부보다 앞서, 그보다 더 앞서 용기를 갖고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리는 동성 커플의 사례는 시대와 무관하게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2025년 비로소 우리의 차례가 다가왔습니다. 현재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는 행정과 입법 공백에 대한 위헌성을 가리는 소송이 헌법재판소에서 진행 중입니다. 이미 시작된 변화 앞에서 혼인평등은 우리가 반드시 넘어야 하는 길이라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마무리하며..
저는 20세가 되던 해부터 본가가 있는 대구시를 떠나 꼬박 7년 동안 서울에서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지금은 파트너와 2년 넘게 동거를 하고 있고, 때로는 다시 혼자 사는 생활을 꿈꾸기도 하고 결혼에 골인해서 삶의 동반자와 함께 여생을 보내는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일상적인 돌봄이 필요할 때, 누군가의 체온이 필요할 때, 소소한 대화 상대가 있었으면 할 때 등, 가족을 향한 우리의 근원적인 욕구는 생각처럼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누구든 동반자의 존재가 필요할 때, 가족을 이루고 싶을 때 “내가 원하는 가족을 구성할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대다수의 청년 성소수자가 저처럼 가족으로의 커밍아웃을 의식한 채, 거부 또는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상황 등을 이유로, 사회에 첫발을 떼는 단계에서부터 본가로부터의 조기 독립을 선택합니다. 1인 독립가구의 주거비 부담, 안정적이지 않은 생활과 같은 어려움 겪으며 성장해온 우리 청년 성소수자들에게 법적 보호 대상의 범위가 되는 ‘가족’의 확대와 혼인평등은 분명한 사회적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5년 다움의 <성소수자 노동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소수자 관련 정책 우선순위’를 묻는 문항(n=2,639, 단위=%, 3순위까지 응답)에 대해 56%의 응답자가 각각 ‘생활동반자법 등 다양한 가족구성권의 제도화’와 ‘동성결혼 법제화’를 가장 시급한 정책적 변화 과제 공동 2위로 꼽았습니다. 법률혼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가족에 기반한 사내 복지 체계에서 배제되어 있는, 직장을 다니는 성소수자 노동자들도 다양한 가족 형태를 포괄하는 방향으로의 사회 변화를 위해 제도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OECD 선진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또는 아시아, 나아가 대한민국에서도 ‘혼인평등’은 이제 따르지 않으면 뒤쳐질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시대의 흐름이자 이미 시작된 변화입니다. 신분제, 인종차별, 호주제, 그리고 동성동본 금혼제가 폐지된 역사처럼,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는 현재의 제도 현황도 가까운 미래에는 역사책을 뒤져보다가 문득 ‘그래, 그때까진 우리가 결혼을 할 수 없었지..’라고 흐릿한 기억을 되살려볼 수 있도록, 다움도 한국의 혼인평등을 향한 여정에 함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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