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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RUN/OUT 프로젝트 활동가 후기

비상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을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힘으로 끌어내린지 200여일이 지났습니다. 정권교체 이후 새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민심의 평가를 가늠할 수 있는 첫 선거도 마찬가지로 200여일을 앞두고 있는데요, 바로 내년 2026년 6월 3일 수요일에 실시되는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입니다.
내년 지방선거와 2028년 총선을 기해 성소수자 정치인의 출마(RUN) 가능성을 함께 모색하기 위한 프로젝트 캠페인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성소수자의 정치 진출, 한국 퀴어 정치의 상상력을 키우면서 출마자의 역량 강화와 네트워킹을 돕는 이 캠페인에 다움의 기진도 활동가로 참여했습니다.
하인리히 뵐 재단의 후원과 한국게이인권운동 친구사이의 주최로 벌써 2회차째를 맞은 ‘RUN/OUT 프로젝트’, 활동가 후기로 그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다양성을 향한 지속가능한 움직임, 다움 운영위원 기진
“@:정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 당연히 상관있지!”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불문하고 여전히 많은 퀴어들에게 ‘성소수자 정치’라는 말은 낯설게 느껴질 것입니다. 넓게 봤을 때 정치는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그룹의 이권을 대변하기 위한 욕망을 동력으로 굴러갑니다. 민주주의 공화정을 국가 체제로 택한 우리나라의 정치 역시 그 대변인의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정치인을 선출하는 대의 민주주의 형태로 발전해 왔습니다.
2025년 현재 우리나라에 성소수자를 대변할 수 있는 정치인이 있냐고 물으신다면, 저도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입니다. 한국 정치에서 성소수자는 여전히 어떠한 불문율로 다뤄지고 있고, 보수/극우 정치인이 성소수자 혐오를 일삼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정치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기에는 성소수자와 정치가 함께 엮여서 나오는 뉴스는 죄다 우리가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나오는 일들뿐이니, 성소수자가 정치 전반에 피곤함을 느끼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정치인이 전면에 나서서 성소수자 집단의 이익이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은 우리에게는 아직 익숙치 않은 모습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집권 여당이 된 현재로서도 이런 정치인의 등장을 마냥 기다리기가 어렵습니다. 당원 활동을 하는 주변인들로부터는 당론이나 당규로 성소수자 차별금지 기조가 확립된 소수정당을 제외한 거대 양당 안에서, 소속 정당과 동료 당원들에게 성소수자에 대한 지지를 바라는 것마저도 어렵다는 고민 섞인 말을 듣습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RUN/OUT’ 캠페인은 성소수자를 대변할 수 있는 정치인이 부재한 정치 환경에서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후보를 내고 출마시켜보자”라는 취지에서 출발했습니다. 영어로 출마를 뜻하는 ‘RUN’커밍아웃의 ‘OUT’과 합쳐져 이전에 한번도 시도된 적 없는 새로운 캠페인이 탄생했습니다. ‘RUN/OUT’을 통해 선거에 도전할 커밍아웃 정치인을 찾고 당선까지 멀리 내다 본 그림을 함께 그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지난 달 9월, 마포구에서 진행된 1회차 행사는 2008년 우리나라 최초 커밍아웃 성소수자 후보로 제18대 총선에 출마한 최은숙 후보의 선거운동 과정을 다룬, 영화 <레즈비언 정치도전기>를 함께 관람하고 소감을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패널 GV로는 2022년 지방선거 대구시 동구 기초의원 커밍아웃 출마자 임아현님과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의 작가, 레즈비언 김규진님이 함께해주셨습니다.
풀뿌리 동네정치가 자리잡은 마포구에서 진행된 덕인지, 공개 행사로는 처음 진행된 1회차 행사였음에도 출마나 성소수자 정치에 관심있는 퀴어는 물론 기본소득당과 정의당, 진보당 등 다양한 정당으로부터 당직 위원장분들과 당원 분들이 많이 참석해주셨습니다. 정치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성소수자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두눈으로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었던 행사였습니다.
지난주 10월 24일에 진행된 2회차 행사에서는 2020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에 나선 다섯 명의 한국계 미국인 후보의 출마 스토리를 조명한 영화 <초선>을 함께 관람했습니다. 패널 GV로는 <초선>을 직접 감독하신 전후석 감독님과 이자스민 전 국회의원(제19·21대, 정의당)님, 그리고 마포구의회에서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기초의원으로 활동하고 계신 차혜영 구의원님이 함께하셨습니다.
‘<초선> 다큐멘터리 공식 예고편’ 유튜브 영상
<초선>에서 출마자로 등장하는 데이비드 김, 출마 이후 미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미셸 스틸과 맨디 김, 메릴린 스트릭랜드, 영 김 후보 모두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정당 색깔은 서로 달랐지만 한국계 미국인인 이민자 2세대라는 공통된 정체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작중에서 미국 한인 사회에 큰 충격을 준 것으로 다뤄지는 사건이 있는데요, 많은 한인들이 발생일자를 그대로 따와 “사이구”라고 부르는 4.29 LA 폭동입니다. 흑인·히스패닉계 사회와 한인 사회 사이에서 쌓인 갈등이 결국 폭동으로 터진 이 사건이 많은 한국계 미국인 이민자에게 큰 충격과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것으로 그려졌습니다. 경찰을 비롯한 미국 공권력이 로스엔젤레스시의 부촌을 방어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한인타운을 보호하기는 커녕 폭동과 약탈의 목표가 된 것을 방관한  상황에서, 한인들은 직접 총기로 무장하고 가족과 집, 살아온 동네를 지켜야만 했습니다. 한인 사회가 입은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대변해주는 인물이 미 정치권에 부재했던 당시 상황이 이후 한인 커뮤니티로 하여금 한인을 대표할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도록 각성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섯 명의 등장 출마자들 중, <초선>이 서사상 가장 비중을 많이 들인 인물은 데이비드 김 후보(캘리포니아 34지구 출마)였습니다. 그는 1세대 미주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2세대 한인이지만 엄격한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란 게이이기도 했습니다. ‘소수자중의 소수자’라는 어려움을 안고 미국 정치 출마에 도전한 것입니다.
한인 사회는 우리나라의 태극기집회와의 관련성이 충분히 느껴질 정도로 기독교 교회를 중심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는, 아주 보수적인 색채로 묘사되고 있었습니다. 이미 SNS와 지역 사회에서 오픈리 커밍아웃한 상태로 활동하고 있던 데이비드 김 후보에게는 출마를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한인 커뮤니티에 동화되고자 정면으로 부딪치는 경로를 택했습니다. 교회 앞에서 한인 유권자들을 만나 인사와 악수를 나누고, 자신의 출마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기업의 정치 로비와 정치 후원이 가능한 미국이었지만 데이비드 김 후보는 거대 자본의 후원 없이 자원봉사만으로 거리 유세를 선거 운동 마지막날까지 이어나갔습습니다. 그의 선거 캠프에는 성소수자, 페미니스트들은 물론, 흑인, 히스패닉, 라틴 등 다양한 인종의 지지자들이 함께했습니다. 선거 결과는 석패, 같은 당 상대 후보보다 겨우 6% 뒤졌으나 그의 정치 진출 도전에는 성적표보다도 훨씬 더 값진 의미와 울림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커밍아웃’이라는 것이 자칫 출마자 혹은 정치인의 이미지를 성소수자로만 고정시키고 정치적 확장 가능성이 될 수 있는 여러 정체성과 의제로의 접근, 그리고 유권자와의 밀접한 접촉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나 외부의 편견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고민이 깊었던 차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영화 <초선>을 통해 정치인이라면 삶과 함께 겹겹의 레이어로 쌓아온 다양한 정체성을 가능성으로 삼아 유권자에게 먼저 다가가고 포괄적인 지지 세력을 모을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패널 GV에서 이자스민 전 의원님과 차혜영 마포구의원님의 말씀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자스민 의원님께서는 <초선>에서 한인 출마자들이 한국인, 이민자 2세대, 여성, 성소수자, 혼혈 등 다양한 정체성을 무기로 당적과 무관하게 한인 커뮤니티를 넘어 정당과 다인종 지역 사회에서 지지를 확보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깊었다며, 한국에서 이주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비례대표로 나서게 되었던 이야기를 풀어주셨습니다.
재선을 목표로 내년 지방선거 출마 준비를 하고 계신 차혜영 의원님께서는, 자신 또한 임기 중 ‘성평등’, ‘비혼’ 등의 의제 영역에 관심을 갖고 의정활동을 펼쳐왔으나 자신을 선출해준 “마포구민 전체”를 대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그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업무를 소홀히 하지 않고 성실하게 구정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최근에는 새로운 지지 루트를 파기 위해 지역 목회자 그룹에 열심히 나가고 있다는 것을 밝혀 웃음을 주셨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하여 선거운동 방식 또한 SNS를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지만, 결국 유세의 기본이 되는 것은 제한된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유권자들과 손을 잡고 이름을 알리는가 입니다. 가시성으로는 자극적인 숏폼을 따라올 매체가 없지만, 유권자들의 표심을 움직이는 것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더라도 한 명 한 명 악수를 나누고 눈을 마주치며 친근하게 다가가는 행위입니다.
성소수자 정치인으로서 ‘커밍아웃’은 자신의 이름과 대표성을 알리기 위해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입니다. 그럼에도 ‘성소수자인 정치인’과 ‘정치인 성소수자’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선, 청년, 여성, 비혼, 소상공인 등 지지 관계를 쌓으며 영향력을 확장해나갈 수 있는 영역에 대한 고민 또한 필수적입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유권자가 선거공보물을 펼쳤을 때, 한 명의 출마자가 가진 이러한 정체성과 정치적 확장가능성을 ‘커밍아웃’과 같은 테이블 위에 놓고 투표 기준으로 비교해볼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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